.../간식거리

- '나는 아프리카인이다' 중 기아, 식인.

맛있는물 2009. 8. 27. 02:42

 

 

 

 

(..전략)

  19세기 초의 중부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매혹적인 책 가운데 하나는 토마스 아르부세의 [선교여행]이다. 최근에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데이비드 암브로즈와 앨버트 브루츄가 편집해서 [1840년 타바 보시우에서 말리바마초 강 수원지까지 나아간 모쇼에쇼에 왕의 원정보고서를 포함한 블루 마운틴의 선교여행]이라는 긴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외젠 카살리스의 동료였던 아르부세가 모쇼에쇼에와 함께 기나긴 원정을 하면서 기록한 일기이다.

  1840년 2월 15일, 아르부세와 모쇼에쇼에는 16년 전에 라코초아네의 식인종들이 왕의 할아버지를 먹어치워 버린 바로 그 장소, 말리몽에 갔다. 그들은 거대한 동굴 속으로 라코초아네를 만나러 갔던 것이다. 그 앞에서 페테의 살을 요리해서 먹었다는 폭포가 있고, 폭포 옆으로 마피케가 카살리스에게 말한 그 동굴이 있었다. 그때는 라코초아네가 모쇼에쇼에의 부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그 집단은 식인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굴을 찾아간 그 이튿날인 일요일에 아르부세는 설교를 하고 기도회를 열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식인관습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라코초아네와 마주앉았다. 족장의 설명은 누구나 이 세상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생존을 위한 식인관습에 대한 매우 훌륭한 정의였다. 그느 아르부세에게 말했다.

  "식인관습의 출발은 배고픔이었습니다. 굶주림이 우리를 집어삼켜 버린 겁니다. 우리는 숫자가 많았지만, 가축도 없고 식량도 없었습니다. 평원에 사냥감은 거의 없고, 사방에는 온통 적들로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각자 자기가 기르던 개를 먹었습니다. 그 뒤에는 신고 있던 가죽신발을 삶아먹었고, 그 다음에는 입고 있던 낡은 양피외투를 먹었고, 급기야 가죽방패까지 먹었습니다.

  굶주린지 엿샌가 여드레가 지나자 팔다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고, 관절이 부어오르고 자꾸 졸음이 쏟아져 꾸벅꾸벅 조는가 하면 온몸이, 그중에서도 특히 목이 뻣뻣해지면서 마비가 되더군요. 하나같이 다 심한 설사를 하는 바람에 수시로 동굴을 들락날락거려야 했죠. 그러다 보니 바깥에서 하이에나에게 낚아채어서 새끼들 있는 데로 질질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사냥이나 채집을 하러 갈 정도로 용기 있는 사람들은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기 십상이었습니다. 대기근의 그 시절에 우리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들은 우리가 몹시 허약하다는 것을 알고, 들판이나 집에서도 마치 수중에 들어온 동물처럼 우리 팔다리를 먹어치우곤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집단의 다른 족장 한 사람은 아르부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차라리 굶어죽는 쪽을 택했습니다만, 일부 대담한 사람들이 굶주려 기진맥진해서 들판에서 돌아오는 친구들을 보고 '여기 네 몫의 고기가 있어. 이것 먹고 기운 차려'라면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고기였습니다. 그들은 그 고기 맛을 보자마자 무척 맛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필시 저주받은 고기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걸 먹은 후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이 설사병으로 죽어나갔으니까요"

  아르부세는 그 족장에게 "그런데 그 모든 잔혹한 행위들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하고 묻자, 라코초아네는 이렇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양심이 찔리고 몹시 괴로웠죠. 하지만 차츰 그런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에 느꼈던 공포는 곧 습관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굶주리던 시대의 양심은 오늘날의 양심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 와서 나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집니다. 내 팔다리를 보면서 전율을 느끼곤 합니다. 혼자말로 이렇게 중얼거리곤 하죠. 제기랄! 바로 우리 자신을 먹은 것이었어! 하고 말입니다. 모두 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정화시켰습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답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때때로 생존 때문에 사람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원주민 아프리카인들만은 아니었다. 남아프리카 해안에 흘러들어서 사람고기를 먹었던 유럽인들에 관한 자료가 최소한 두개나 존재한다. 최초의 사건은 라코초아네가 살았던 시대보다 거의 300년 전에 지금의 크와줄루-나탈 지역의 해안에서 일어났고, 또 한 사건은 페테가 죽기 131년 전에 케이프 지역 서부해안에서 발생했다.

  1554년 2월, 페르낭 달베레스 카브랄 선장이 지휘하는 포르투칼 함선 상 벵투 호는 엄청나게 많은 노예와 교역상품을 싣고 인도의 서부해안을 떠났다. 아프리카 해안 근처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조타기계가 파손되어서 표류하다가 이스턴 케이프 해안에 있는 세인트존스 항구 남쪽의 암초에 부딪혔다. 약 140명이 익사했지만, 노예 224명과 포루투칼 선원 99명은 배를 해안가로 끌고 갔으며 그중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동쪽해안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가끔 포르투칼 선박들이 교역하던 델라고아 베이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창에 십자가상을 매달고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던 날, 그들은 2년 전 1552년 6월에 좌초된 포르투칼 상선 상 후앙 호의 잔해를 맞닥뜨리고 정신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상 후앙 호는 최초로 남아프리카에서 난파된 배로 알려져 있었다. 승무원과 승객들은 해안으로 걸어갔으나, 1553년 5월에 잉암바너라는 지역에서 발견되었을 때는 불과 22명만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상 벵투 호의 생존자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매함선의 불행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날의 셰프스톤 항구 근처에서 그들은 인도인 노예를 만났는데, 그는 움코마스강 가까이 있는 원주민 공동체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또 이 움코마스강에서는 우연히 하스파르라는 이름의 무어인 한 명도 만났으며, 지금의 더반에서는 로드리고 트리스탕이라는 포르투칼인 선원을 만났는데 시커멓게 그을린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훌륭한 사냥꾼이 되어 있었다. 그 인도인은 코사족 사람들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떠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하스파르는 자청해서 그들의 통역관이 되었고, 트리스탕은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합류했다.

  상 벵투 호 사람드른 잘 지내지 못했다. 몇몇은 병으로 죽엇고, 또 몇 사람은 도중에 마주친 상당히 큰 강들을 건너다가 익사를 당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사자나 하이에나 혹은 적대적인 지역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카브랄 선장은 투겔라강에서 익사했다. 선장이 죽은 뒤로는 갑판장 프란시스코 피레스가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그들은 절망적인 굶주림에 시달렸다. 상 벵투 호에서 일어났던 대부분의 사건들을 밝히고 있는 일기에서, 마누엘 데 메스퀴타 페레스트렐로는 이따금 메뚜기라든가 딱정벌레, 도마뱀을 발견하면 친구나 친척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이빨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할퀴며 싸웠다고 쓰고 있다. 한번은 해변에서 하얀 게들을 보자마자 날것으로 먹어치워 버렸다.

  "그 게들을 어찌나 허겁지겁 입 속으로 쑤셔넣었던지, 입가에는 집게발이 입술을 꽉 깨물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또 반쯤 씹힌 나머지는 꿈틀거리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들이 움쿠제강에 이르렀을 때, 선두행렬에 있던 선원 네 명이 극도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그 지역 흑인 한 명을 살해해서 그 살을 먹었다.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 희생자의 친구들이 향연을 즐기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죽여버렸다. 그런 다음 그 종족은 상 벵투 호의 나머지 사람들을 공격했다. 두 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 끝에 포르투칼 사람들은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와 멀리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미 스무명도 넘게 죽음을 당했다.

  1554년 7월7일에 포르투칼인 56명과 노예 6명 등 생존자들은 델라고아 베이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첫 포르투칼 배가 도착하는 11월 3일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그때는 포르투칼인 20명과 노예 4명만 살아있었다. 그 가운데는 발가벗은 사냥꾼 로드리고 트리스탕과 기록관 페레스트렐로도 들어 있었다.

  흥미롭게도 불과 40년 후 1593년에, 다른 포르투칼 배 산토 알베르토 호가 상 벵투호와 거의 똑같은 장소에서 난파를 당했다. 역시 생존자들은 델라고아 베이까지 걸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때는 그 배의 승객이었던 누누 벨루 페레이라라는 명석하고 강인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귀족이었으며, 전에 모잠비크의 포르투칼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적이 있었다.

  페레이라는 상 벵투 호의 생존자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해안을 따라서 가기보다는 차라리 내륙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지역의 족장들과 식량으로 교환할 청동, 목걸이, 못 족쇄, 실크옷감 등을 충분히 가지고 갔으며, 원주민과의 갈등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패레이라 일행은 난파선을 떠난지 90일이 지난 1593년 7우러에 델라고아 베이에 도착했다.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포르투칼인 125명과 노예 160명 중에서 포르투칼인 117명과 노예 65명이 델라고아 베이까지 갔다. 나머지 노예 95명은 죽은 것이 아니라, 도중에 마주쳤던 그 지역 흑인농부들과 함께 살겠다며 그곳에 남는 쪽을 택했다.

  16세기 말에 남아프리카의 토착 흑인농부들 속에서 살게 된 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인육을 먹은 또 하나의 사건은 1693년에 발생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 상선 데 구던 바위스 호의 승무원들과 관련이 있다. 이 배는 1693년 5월에 네덜란드를 떠나 항해를 했는데, 적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승무원들 상당수가 괴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상황이 어라나 나빴던지, 11월 11일 배가 케이프 지역 서쪽해안의 세인트헬레나 베이에 닺을 내렸을 때는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해안가로 노를 저어갈 수 있을 만큼 힘이 남아 있는 사람은 단 일곱 명밖에 없었다.

  그들은 괴혈병으로 이빨이 흔들흔들 빠질 것 같아서 배에 남은 음식조차 먹을 수도 없었다. 다만 와인 한 병과 브랜디 한 병만이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 해안으로 갔던 사람들은 일행 한 명을 잃어버리고 다시 배가 정박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보트가 파도에 부숴져 버려서 노를 저어서 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셔츠를 노에 묶어서 흔들며 고함을 치고 비명을 질렀지만,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음식과 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나섰다.

  이 사람들, 적어도 그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코끼리와 하마, 엘란드,하티비스트와 그리고 가끔씩 사자까지도 보았다고 말하는 보고서를 읽는 일은 매우 재미있다. 지금 우리는 오늘날의 드바르스커스보스와 펠트드리프트, 프레던뷔르흐, 호페필트 지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회계원 야코프 레피는 그 다음날에 병에 걸렸다. 그래서 목수 라우런스 티스가 그의 곁에 남기로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이동을 했다. 그러나 레피는 죽었고, 티스는 그 자리를 떠나 길을 가다가 다행히 코이코이족의 한 집단과 만났다. 그들은 티스를 자기들 속으로 기꺼이 맞아들여 먹을 것을 주었다. 그리고는 네덜란드 사람 하나가 머물고 있는 사라다나 베이로 전령을 보내주었고, 그렇게 해서 티스는 곧 구조되었다.

  다른 세 사람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절망적인 굶주림과 갈증에 지친 이들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은 아프리카 덤불 속을 빙빙 제자리에서 맴돌고만 있었다. 너무 목이 탄 나머지 바닷물을 먹는 바람에 몹시 앓게 되자, 급기야 자기들 오줌을 마시기 시작했다.

  1693년 크리스마스 다음날에 그중 한 사람 얀 크리스티안즈가 죽었다. 살아남은 나머지 두 명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마침내 여기, 그들이 먹을 고기가 얼마간 있었다. 그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그 배의 군 지휘관은 자기 동료 다니얼 실러르만에게 다음과 같은 논리를 내세웠다. "만일 우리가 얀을 먹는다면, 우리는 살 것이다. 그러나 먹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다.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그분은 죄라고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실러르만은 동의했지만, 차마 친구의 몸을 토막내는 것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지휘관이 고기를 자르면 자기는 불을 지피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얀의 살을 불에 구워서 먹기 시작했다. 실러르만에 따르면. 고기는 너무 질겨서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너무 오랫동안 크리스티안즈는 음식도,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그들은 나중에 먹기 위해 약간의 고기를 꾸러미에 싸서 각자 가방에 넣었다.

  다음날 그들은 코이코이족의 한 집단에게 발견되었고, 그 사람들이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주었다. 그 코이코이족은 두 사람을 마을로 데리고 가려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걸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코이코이족 사람들이 그들을 부축해서 데려가려고 실러르만을 팔로 잡아당기자, 실러르만은 (아마 그 전날에 자기가 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식인종이고 자신을 점심으로 먹으려 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는 칼을 꺼내 싸우려고 들자, 코이코이족 사람들은 그들을 내버려두고 가벼렸다. 지휘관은 며칠 후 죽었다.

  마침내 실러르만은 구던 바위스 호가 닻을 내린 해안으로 돌아갔다. 너무나도 기쁘게 그는 배 두 척이 구던 바위스 호를 구조하기 위해 와 있는 것을 보았고, 처음 뭍에 오른 지 42일 만에 구출되었다. 만일 친구 얀 크리스티아즈를 먹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을 것이다.

  구던 바위스 호를 구조하기 위해 온 배들은 그 배에 단 한 사람만 살아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튿날 그 사람은 죽었다. 항해를 시작했던 189명 가운데 두 명만이 살아남았다.